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New 요한복음 1장 18절 강해
18절 (강해요약)
그가 들려 주었습니다. " 나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바르게 해라!' 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음성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
박경호헬라어 번역성경 New 요한복음 18절 입니다.
" 그가 들려 주었습니다 " 들려주다! 세례요한이 결론적인 사항 또는 하고싶은 말을 알려준 것입니다.
" 나는 " 나는 누구예요. "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 바르게 해라! " 이제 설교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설교자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 주님의 길을 "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시려면 길이 있어야 합니다. 길을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길이 없이 갈수가있나요? 차도없이 차가 갈수가 있나요? 예수님도 우리 마음에 못 들어오십니다. 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설교가 무엇이죠. 설교는 예수님이 그 심령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내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구원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하는 일은 예수님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죄가 있으면 예수님이 우리안에 못 들어오십니다. 기독교는 죄인 구원을 외치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가 있으면 예수님이 내 영에 못 들어오십니다. 길이 없는데 어떻게 들어오겠어요. 우리 안에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장벽들 입니다. 미움 죄가 있어도 주님은 못 들어 오십니다. 음란이 강해도 우리안에 못 들어오십니다. 시기,질투 있으면 우리안에 못 들어 오십니다. 우리안에 이런 탐심이 있으면 못 들어오십니다.
그전에는 거듭날 때, 성령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예수님께서 못 들어오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네가 구원을 왜 못 받는지 알아! 네가 이러 이러한 것이 있어서 못 받아! 하는 것입니다. 그 죄가 해결되어야만 예수님이 들어오시는데 우리는 거꾸로 구원받은 다음부터 성화 된다고 합니다. 물론 구원 받아도 성화는 됩니다. 하지만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주 질긴 것이 있습니다. 괜한 고집이 있구요. 우리 안에는 괜한 교만이 있구요. 그것이 있어서 우리 스스로가 괴로운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괴로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 안에 있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지. 내가 날 괴롭히지 누가 날 괴롭힙니까? 지금 시대는 자폐아가 많고 고독사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가 외로워하고 자기가 힘들어 하고 자기안에 있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메신저가 하는 일입니다.그러므로 설교자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옮겨 놓을수도 없고 그렇지 않습니까?
" 주님의 길을 곧바르게 해라! " 이것은 뭐지요. 길이 이렇게 울퉁불퉁해서 예수님이 들어오시는데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설교자는 무엇을 하느냐 그것을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어떻게요. " 곧바르게 " 그 굽은 길은 주님이 오시기 힘든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빨리 들어올 수 있도록 그것을 치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온갖 오물들이 있습니다.사실 우리는 똥 덩어리 입니다. 이것들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똥을 치워서 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그것을 곧바르게 정리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 자체이시고 우리 인간은 죄인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은혜 입니다.
" 광야에서 " 광야는 거듭남부터 구원 사역까지 광야 입니다. 세례요한 사역은 무엇이냐? 거듭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역이 세례요한 역할입니다. 거듭남의 역할이 아닙니다. 이미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구원이 안됩니다.
왜 안되느냐 거듭났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령님을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거듭난 영혼들에게 외쳐서 죄를 지적해 주고, 죄를 청산시켜 죄를 사함받게하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며 길을 내어서 가나안으로 가게하는 역할, 가나안만이 구원입니다.
데라와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 라고 듣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하람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유프라테스 강이 있어서 이들이 강을 못 건너가니까 상류로 넘어가서 유프라테스 상류에 하란까지 더 올라가야하니까 가지않고 정착합니다. 결국 데라는 죽습니다. 나홀도 거기서 죽습니다. 다! 지옥 입니다.
지금은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그 자손들도 왜 일까요? 가나안 땅 만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구원의 모형 입니다. 그들이 왜 못 갔을까요? 불순종! 데라가 믿음을 갖고 있어서 갔지만 중간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못 넘습니다. 동방 땅은 지옥입니다. 거기서 죽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쉬웁니까?
거듭나서 열심히 교회를 다닙니다. 거듭나서 열심히 헌신도 하고 다하는데 지옥가는 것입니다.구원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인생낭비 입니까? 기껏해서 세상 다 버리고, 교회에 왔고, 충성스럽단 말도 듣고, 칭찬도 듣고, 또 이제 인기도 얻었는데, 결국 지옥에 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야를 건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벗어나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 광야에서 외치는 " 외치다! 설교는 공부가 아닙니다.설교를 공부로 보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적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는 공부가 아닙니다. 공부는 적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입니다. 그것은 가르침으로 필요합니다. 가르침이 구원이 아닙니다. 가르침은, 거듭남과 구원의 여정을 좋게 만드는 Side로 돕는 것이지, 설교는 외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아! 그런데요. 이런말을 하지 않습니다. 크게 말합니다.
옛날 우리 어렸을 적에 부흥사 분들의 설교는 대부분 조근조근 하지 않습니다. 보자 마자 장로! 이리와! 목사! 이리와! 하고 강대상을 치며 진짜 안하무인으로 행동을 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인들은 참된 종이 없기 때문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무서워 합니다.
설교의 메세지 대상은 머리가 아닙니다. 메세지를 머리로 받으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머리로 받는 사람들은 천국 못갑니다. 마음으로 설교를 받아야 합니다. 아멘과 예! 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 마음속에 치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사 맞으려고 병원에 가서 그냥 맞지 않고 나오면 치료 됩니까? 안됩니다. 매일 병원은 다닙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사를 맞아야지요.
주사는 아픕니다. 세상에 아프지 않는 주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안 아프면 그것은 주사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먹는 약도 쓰지 않은 약은 별로 없습니다.
거듭난 영혼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쓴 것을 줍니다. 쓴 주사를 맞추고 쓴 것을 먹이는 것입니다. 아니면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기복을 말하고, 성공을 말하고, 전부다 달달한 약들 입니다.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이것은 약 아닙니까? 거꾸로 세례요한은 쓴 약을 먹입니다. 쓴 것을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내면의 죄악을 막 드러내어서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치료가 됩니다. 안되면 하나님께서는 두번째로 따로 때려서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시는데 육이 아닌 우리 영을 치료하십니다.
영적인 깊은 내면을 치료하시는데 우리 내면은 좋지 않아요. 그래서 내면이 이제 좋아져야 하는데 전부 다 우리 죄랑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허영심, 명예욕, 탐심 이런것이 우리 안에 많습니다.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꾸 지적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적하지 않으면 솔직히 모르고 삽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대부분 일반교회는 지적하지 않습니다. 겉에 보이는 것만 지적합니다.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참 교회에서는 마음을 보여주는 줍니다.
무엇을 통해서 참된 설교를 통해서
그래서 " 외치는 음성 " 입니다. 음성을 소리라고도 하는데 말하자면, 세례요한의 외모, 성향, 옷, 또 뭘 먹고 사는지 옷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메세지 입니다.
이 메세지는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이 메세지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세울 때, 어떤 사람의 외모라든가 어떤 사람의 장점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메세지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믿으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누구를 믿는다 하는것은 그 메세지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 나는 그사람 좋은것을 알지만, 그 메세지는 못 듣겠어! 뭐예요. 하나님을 믿지않는 것입니다.
메세지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음성이라는 것은, 통변 예언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계시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은, 이 설교 중에서도 성령의 음성이 있는 것입니다. 없으면 설교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왜 합니까? 지식이면 그냥 책을읽지요.
설교는 그속에 성령의 음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설교는 지식이 아닙니다. 설교를 작성할 때, 이것저것 다 찾아봅니다. 그것은 지식입니다. 성경에 있는 지식을 전달하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지금 당사자에게 필요한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내용을 전달해서 같이먹는 것입니다. 설교는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성 입니다. 음성은 뭐지요. 음성은 귀에 들려주는 것이 음성입니다.
앞에 사람이 있는데 얘기를 어디다가 합니까? 내 말 들으라! 이렇게 합니다. 그렇죠! 음성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그 사람 들으라 하는 것입니다. 들려주는 것입니다. 귀에? 아니죠. 마음에 들려주는 것입니다. 음성 입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집을 설교를 하기 위해서 막 끌어 모읍니다. 설교 누가 잘하나해서 설교를 서로 구경도 하고 목사님들도 설교를 막 어디서 가져와서 베낍니다. 그것은 지식 입니다. 왜요?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음성은 나로부터 나가야 음성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받은것을 전달하는게 무슨 음성입니까? 음성은 말이 음성입니다.설교는 지식이 아닙니다. 설교는 쉬어도 됩니다. 설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 뻔한 내용들입니다. 그것을 왜 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지식 적이고, 논리적이고 우리가 말할 때, 논리적입니까? 이것저것 말하다가 농담도 하고 그렇잖아요.
우리가 설교를 오해해서 자꾸 이것은 이렇게 해서 이렇고 막 지식을 쌓으면서 스스로 만족을 느낍니다. 많이 배워서 나중에 시간 지나면 죄를 못 이깁니다. 시간 지나서 내가 변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계를 느낍니다.
진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모든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참된 설교로 말미암아 우리가 변화가 되면 사람이 바뀌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지식만 주입 받으면 그게 지식인 줄 모릅니다. 왜요. 지식이란, 것은 변화가 안될 때 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논리도 없고 앞뒤도 없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고, 살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는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지식을 배웁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마음의 변화를 못시켜 줍니다.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보내주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의 메세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메세지를 믿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통해서 보내어진 유대인들이 드디어 마지막 말을 듣고 돌아가고 이제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또 옵니다. 안타깝죠! 그 시간에 세리들은 구원에 들어가는데 이들은 기껏! 보고도 못오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런 비운들이 엄청 많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에 와서 거기서 믿음으로 오면 되는데 와서도 믿지 않으니 그리고 이제 지옥에 갑니다.
우리 사람은 악이 꽉 차서 그냥 입에 넣어줘도 안 받습니다. 진리를 넣어줘도 받지 않아요. 그렇게 인간은 악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받으려면 어느 정도 우리가 조금 악이 제거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아예 거부합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때부터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귀한 진리를 받았어도 기록된 것처럼 허탈하게 돌아가서 보고만 할 뿐 드디어 그들의 운명은 끝난 것입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