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New 요한복음 1장 16절 강해


 16절 (강해 요약)

그들이 그에게 요구하여 물었습니다. " 그런즉 누구입니까? 당신은 엘리야입니까? 그가 말합니다. " 나는 아닙니다. " " 당신은 선지자 입니까? " 그가 대답했습니다. " 아닙니다! "

박경호헬라어 번역성경 New 요한복음 16절입니다.

" 그들이 "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보낸 유대인들입니다.

"그에게 " 그는 세례요한입니다. "요구하여물었습니다."  그냥 ' 묻다 ' 입니다. 여기에서는 답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입니까? " 이제 좀 다른 스타일로 예배를 인도하고, 다른 스타일로 복음을 전파하고, 또 세례요한이고 이게 좀 생소하기도하니까 이것을 진단 내려야 하는데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 당신은 엘리야입니까? " 엘리야! 엘리야는 이제 나중에 메시야 오시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혹시 약속된자 아닐까? 하고 오랬동안 선지자들이 왔었지만, 조금 색다른 선지자이고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도 있어 보이니까 높이 인정해서 엘리야 입니까? 

물론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엘리야 개념은, 사실 이런 부분이 아니고 원래 그냥 능력과 불의 사자로서 이해 되었는데 일단 그래도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언된 자로서는 유력한것이 엘리야 이거든요. 세레요한은 엘리야의 영을 갖고 온 예언된 엘리야의 영 맞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어라 말합니까? "나는 아닙니다." 부정입니다. 엘리야의 영으로 온자라고 예언되어 있을지라도 나는 엘리야와 같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엘리야의 영이라는 것은 능력의 영이 아닙니다. 그 영은 엘리야처럼 회개하는 삶, 그렇다면 구약에서 볼 때, 엘리야가 회개하는 내용이 써있나요? 써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회개를 엄청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이 전체가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의 통으로 된 책인데, 

회개를 엄청 많이 한 엘리야! 단지 그 내용이 써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가 정확히 그 인생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돌출된 부분만 정확히 기록된 것 뿐이지, 다른 내재된 내용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엘리야를 알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엘리야는 회개의 사람이구나! 하고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요 세례요한은 회개의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많이 하나님 앞에 울고 자복하고 했기 때문에 남에게 은혜가 간 것입니다. 

뭐든지 내게 은혜가 있어야 그 은혜가 가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도 안하면서 전하면 회개하고 싶겠어요! 지금 세례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세례요한이 엘리야처럼 회개를 엄청 많이 한 것이고, 동시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시게 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느냐? 믿음이라는 것은 먼저 해야 할 것이 애통이 일어나는 회개가 기본입니다. 안되면! 눈물없는 신앙은 다 가짜 입니다. 눈물이 왜 안나오느냐 그것은 말씀을 몰라서 안나오는 것입니다. 말씀 모르면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모르는데 지옥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가짜 말씀입니다.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이 나에게 눈물을 동반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 그것이 애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모든 말씀은 다 지식이지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애통을 주는 것으로 다 나갑니다. 죄를 지적합니다. 

이것이 선지자! 입니다.이것이 바로 참! 말씀입니다. 참 말씀이 무엇이냐 참 말씀은 지식이 아닙니다. 다윗 골리앗 알아서 무엇할 것입니까? 다니엘 알아서 무엇할 것입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런것을 하지 않습니다. 죄를 알려 주어서 지옥에 가지않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 지식은 왜 필요합니까? 그런 지식이 하나로 맞추어져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분적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로 맞추어질 때, 내게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맞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부분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거꾸로 입니다.

성경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가 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알 때, 서두만 알거나 부분적인 것만 알지 않고 다 알지 않습니까? 전체를 볼 때, 그것을 통해서 나에게 감동이 오지 않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진리는 꿰어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주 목걸이를 만드는데, 여러개가 있어야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지요. 달랑! 진주 두개만 있다면 만들수가 있습니까? 안됩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전체가 다 꿰맞추어져야 진주 목걸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분적 성경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굉장히 오래 전에 깨달았습니다. 왜 신앙이라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분적 지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 전체를 다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를 이해해야 만이 이것이 나에게 의미로 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 당신은 선지자 입니까? " 선지자 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례요한은 실제 선지자 엘리야의 영을 가지고 온 사람 입니다. 그런데 웃깁니다. 선지자가 말하기를 '나는 아닙니다. 선지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입니까? 선지자는 우리가 스스로 나 선지자야 하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원래부터가 나 선지자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기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자기가 선지자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다윗도 스스로 자기가 선지지라도 한적이 없습니다.

선지자의 개념은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사도 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전부 다 자기가 사도라고 말합니다. 가짜 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자기가 선지자라고 안한 것이 잘못인가요. 아닙니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직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개념은 계시나 예언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선지자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예언하면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은사는 거듭나고 받는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구원받지 않아도 예언의 은사를 많이 받습니다. 그것이 무슨 선지자 입니까? 어린사람이지! 은사가 신앙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선지자를 이해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선지자라고 합니다. 음성은 거듭나면 누구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누구냐? 거듭나지 않은 영혼이나, 거듭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자! 이것이 선지자 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자를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쉽지도 않을 뿐더라 많지도 않습니다. 단순히 생각할 때는 나도 구원 받았으니까 인도하면 되지!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불신자를 인도해 보세요! 쉬운것인가요? 똑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있지만 잘 안됩니다. 영적인 역량이 커야 합니다.나무가 커야지 새들이 깃들지요 작은 나무는 새들이 깃들지 못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영이 커야지만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냐 우리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어떤 소리이냐 내 안에 계신 에수님을 전파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죄인에 불과합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선지자로 부르신 것 뿐입니다. 선지자로서 나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나를 사도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선지자다, 내가 엘리야다, 이 두가지가 맞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거부합니다.

거꾸로 지금 시대는 자기 스스로가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는 거부하고 가짜를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가야 합니다. 너는 선지자다!  또는 너는 복음전파자다!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교사, 목사, 복음 전파자, 그 다음에 선지자, 사도라는  영적 직분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명령해야 말하는 것이죠. 말하지 않으면 말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냐 내가 하는 일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목적이 엘리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면 더욱 영광스러운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떻게 이렇게 낮아졌을까 입니다. 자! 이런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적인 고통을 많이 경험합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굶어가면서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영이 어릴때는  육적인 행복은 좋아하고, 육적인 고통은 무서워 합니다. 그런데 영이 장성하면 반대로 고통이 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의 요인은 육적이지 않습니다.

 불행의 요인은 영적인 고통입니다. 영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영이 아플까요? 영때문에 아파서 괴로워해요. 삶이 괴롭습니다. 뭘해도 복을 받아도 보통 복받고 신앙이 나쁜 사람들은  지옥에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영의 사람들인데 우리가 잠을 자면 잘 모릅니다. 영이 깨어나면 영이 고통을 느낍니다. 어떤 고통이냐 인간이 죄를 지으니까 죄의 고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또 우리 안에는 마귀가 있는 마귀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체질적으로 우리 영에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타콤에 살아도, 순교를 당해도, 감옥에 갇혀도, 많은 고통을 당해도, 그 고통 보다는 영의 고통이 커서 육의 고통이 거꾸로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 때문에, 이제 밥도 잘 못먹고 고통 때문에, 누구도 만나지 않고 고통 때문에, 가지도 않고 아프니까 육적일 때는, 육적인 행복을 위해서 가고, 만나고, 먹고, 신나고, 그런데 영이 아프면 육이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영이 아프니까, 세례요한처럼 남들이 없는 광야로 가서 거기서 고통하며 아파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세례요한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엄청 아파합니다. 엄청 아파해요. 그럴 때 무엇이 열립니까? 바로 하나님이 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례요한이 천국과 지옥을 알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은사일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세례요한이 사람을보면 그냥 알까요? 왜죠!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엄청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옥으로 던지십니다. 하나님이 너무 아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 평강이 넘치고, 은혜가 넘치고, 그러면 천국은 무엇하러 만듭니까? 하나님은 반쪽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너무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마귀에 대해서 너무 아파합니다. 그래서 지옥이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과 같은 감정이 이입되었습니다. 너무 아프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쉬운 것입니다. 보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너! 지옥간다! 너! 천국 간다!눈이 멀고 잠자는 죽은 사람은 모릅니다. 느낌이 없습니다. 육만 느끼는 것입니다. 영이 깨어있고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영을 느끼는 것입니다.

  신령함이 무엇이냐 신령함이라는 것은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함은 하나님 같은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비슷한 것,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그 품성이 내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평안이 넘칩니다. 하지만 한쪽에는 고통이 넘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바울이 그런 고통을 다 견디었을까 의문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영의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의 고통으로 별로 고통을 못 느낍니다.

더 큰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순교의 삶입니다. 순교는 그냥 나가서 딱! 죽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는 육이 죽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순교가 아닙니다. 육이 죽었기 때문에 희노애락은 없습니다. 영의 희노애락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입니다. 

천국가는 사람들은 다 순교해야 천국에 갑니다. 영이 내 안에 죄 때문에 막 아파합니다. 그것이 애통입니다. 내가 어두움 때문에 막 아파합니다. 그래서 축사가 되는 것입니다. 축사라는 것이 예수님 이름으로 나가라! 이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선지자는 이렇게 가는 것이 선지자 입니다. 쉽게 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내가 무엇때문에 힘이드냐 이것입니다 힘이드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에 힘들고, 마귀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오자마자 ' 독사의 새끼! ' 라고 아예 오지 못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너는 도저히 안돼! 그런 것입니다. 백성이 오니까 너는 돼! 하고 회개시키고 이런 급수가 있었을까요?  선지자들 가운데 있었을까요? 드뭅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들 가운데 급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군중 선지자 입니다. 호강 좀 했습니다. 크다 할지라도 하지만 이사야가 천국 지옥을 봤습니까? 못 봤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보는 것입니다. 누가 높은 사람입니까?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높은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단, 사역은 짧았지만 그 영적인 파워는 엄청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광야에 가서 살겠습니까? 못합니다. 시켜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된 사람입니다. 

자기를 선지자라 부르지도 않고 자기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언 되어 있습니다. 소리에 불과하다고 정확하게 자기를 표현 합니다. 우리가 영이 좋아지면 자기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벌레같은 존재야! 나는 죄인이야! 나는 티끌에 불과해! 하고 자기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높다고 생각한다고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낮은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를 인식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예수님은 진짜야! 라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참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그치지 그것 때문에 명예를 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도구로 쓰임받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앞으로 세례요한, 그가 얼마나 큰자 인가를 더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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