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호목사의 헬라어번역성경 New요한복음 1장 1절 강해
1절 (강해요약)
처음에 말씀이 계셨으며, 말씀은 하나님과 계셨는데, 하나님은 말씀이셨습니다.
박경호 헬라어 번역성경 New요한복음 1장 1절 입니다.
" 처음에 말씀이 계셨으며 " 처음이란 단어는 모든일에 처음입니다.
천지가 만들어질 때도 처음이란 단어를 쓰셨는데 이 때도 그 처음일까요? 아닐거예요.
먼저 영계가 만들어지고 천사들과 마귀들이 만들어집니다. 물론 마귀가 처음에는 천사들이었지요. 천사들이 만들어지는 처음, 영계가 만들어지는 처음일까요? 아닐거예요.
이 처음은 그 이전에 처음, 자연계와 영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처음, 하나님에게도 처음이 있으실까요? 처음이 없으시죠! 처음이 없습니다. 처음이 없는것이 가능할까요?
자연계는 처음이 있습니다. 영계는 처음이 없을수도 있을 것입니다.영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원이란 개념이 들어갑니다.
계시록 마지막 장에 보면 새 하늘, 새 땅, 다음에 더 이상에 그 무엇이 있지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완전한 영계에서는 시간이 없습니다. 처음도 끝도 없고 그냥 고정된 것입니다.
활동도 할수있고 공간도 있지만,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 시간 개념을 나타내는 것은 자연계에만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가 사라지면 시간도 없어지지만 공간 개념은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영계는 시공간을 초월한다고 하는데, 시간은 없어도 육체도 있고 공간도 있습니다.
처음이라는 이 단어는 영계속에 있던 무한정 그 아무것도 없는 처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지 않는 처음입니다. 원래는 없으나 우리가 알기쉽게 처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 말씀이 계셨으며 " 이 말씀이란 단어는 '로고스' 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66권이 '로고스' 입니다. 이 66권이 우리에게 나올때에 '레마한다' 라 합니다. 레마한다는 것은 '말씀하신다' '말씀을 선포하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66권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 66권은 아주 처음부터 입니다. 이 성경 66권은 모세가 처음썼지만, 사실은 그 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기원이 무엇이냐? 이런 것입니다.어떤 책을 쓸때 이미 저자는 책의 내용을 다 알고있습니다. 저자가 다 알고있는 내용 그것이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66권의 기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에게 쓰게 하신것이 아니라 이 66권은 이미 처음에, 맨 처음에 있었던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 말씀은 하나님과 계셨는데 "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성부하나님과 이 말씀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계시록 뒤에있는 '신천신지' 이것이 하나님 말씀안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이상 안쓰여지겠죠! 말씀은 영원하니까 이미 그때 아담도 있었고 다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 스토리에서는 나중에 아담이 만들어지지요. 이미 그때 있었습니다. 천사가 타락하지요. 이미 그때 있었습니다. 이미 사울이 거기 있었고 다윗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행한 다음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은 66권이 다 있었고 쓰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자연계와 영계전에 하나님 말씀은 함께 있었구요.
" 하나님은 말씀 이셨습니다 " 이 말씀은 누구냐? 하나님 이십니다. 자! 말이 되지 않지요. 하나님과 계셨는데 그러면 하나님=말씀이라는 것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된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신데 이 말씀은 동등된 하나님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말씀이신데 이 예수님께서 이미 과거의 모든것을 다 갖고계신 것입니다.
성경 66권에는 나중에 성전을 짓고 율법이 반포되고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책의 저자는 책의 내용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책이 써지지 않아도 이미 압니다. 거기에는 천지창조가 들어있구요. 뭐 영계도 있고 다 있습니다. 어디에요? 저자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누구 안에 있나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씀과 동일시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주인공 입니다. 이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에 관하여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1600년 동안 쓰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조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쓰게하십니다. 이미 전부있는 내용들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쓰게하시는데 그 쓰게하시는 내용을 우리가 읽게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느냐
예수님께서 그것을 쓰게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거듭남과 구원과 영생이라는 목적이 이행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목적은 세상적인 복을 받는것이 아니라 또 병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목적은 거듭남을 통해서 구원과 영생이라는 목적을 얻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계시적인 만남, " 오늘 나에게 나타나셨어! "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 전에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66권을 주셨기 때문에 이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표적과 기사가 강한 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안 일이 일어납니다. 꿈을 꾸었는데 그런데를 다녀오면 항상 하나님께서 꿈에 보여주실때 사람들이 옷을 입지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아주 더럽습니다! 멀쩡한 교회라 할지라도 꿈에보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더러울수가 없습니다. 꿈에 본 목사님들도 얼마나 더럽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아주 많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제 꿈에 분당에 있는 몇몇 교회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교회 교육장에 성도들이 앉아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모두 세마포 옷을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에 책을 놓고 있었는데 참 재미있었던 것이 원래 성경책은 빨간색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도 저마다 빨간 글씨로 된 책을 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제 분당으로 가거라!"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구원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이런 기적이나 표적이나 이적을 근본적으로 좋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오해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으며 어떻게 영생을 누리느냐? 그것은 오직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공부하는 것이 이것이 구원과 영생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말씀을 잘 이해하기 좋게 잘 가르치느냐? 이것이 핵심 말씀입니다. 그러면 '로고스'는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고스'를 이해할때 성경 66권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외경이 또 있습니다. 또 '몰몬경' 이 있습니다. 또 비슷한 것으로 '코란' 이 있습니다.
뭐예요 그것은 '로고스'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 66권만이 '로고스' 입니다. 그러면 여기 66권에서 뺄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성경은 짝이 있습니다. 그래서 66권은 다 짝이 맞아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외경과 다른 모든것들은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안식교 만든 사람이 쓴 책도 사람들이 많이들 봅니다. 그러나 성경하고 서로 맞지 않습니다. 아닌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1장으로 된 빌레몬서라 할찌라도 뺄수가 없어요. 말씀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은 'onestory' 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로마서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영화보는데 극적인 장면만 보는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영화를 보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onestory' 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말씀을 통해서 거듭남과 구원과 영생을 누리는가 입니다. 그것은 'onestory' 가 되는 성경 66권을 내가 통으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선지서 읽을때 구원이 있습니까? 그러면 읽더라도 가운데만 읽지는 않지요 그렇게 된다면 핀잔을 듣게 됩니다. 읽으려면 다 읽어야지 뭐 그렇게 읽느냐 하지 않습니까?
자! 왜 구원이 어려운가?그것은 부분적 발췌 또는 한 일부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코끼리가 있는데 코끼리 다리를 붙들면서 "코끼리는 이런 존재야!" 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리일뿐 코끼리라고 할수 없습니다. 장님 입니다.
코끼리 실제를 알려면 전체를 봐야 아는 것입니다.그래서 '로고스'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절까지 전체를 다 이행해야만 실제인 예수님을 내가 온전히 믿어서 우리가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모세오경과 역사서 그리고 시가서 그리고 선지서 복음서 사도들의 편지 이 여섯개의 카테고리를 몽땅이해해야만 예수님을 이해한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안에 들어오는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말씀을 통해서 영생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런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거듭남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혹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거듭남은 주지만 구원에 도달되지는 못합니다. 왜일까요? 말씀의 부분적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구원을 일으키는데 말씀을 많이 읽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구원뿐만이 아니라 영생으로 이어집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번역으로 들어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의 중요성을 저에게 많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성경이 중요한지요!
신앙생활을 할 때에 무엇으로 들어갈까요?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체험이나 감동 어떤 은혜 그 모든 것들은 직접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 66권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어 오셔야 하는데 이것은 말씀으로 되는 것이지 계시적인 만남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게 들어오셨어!" 이것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만 '로고스'를 통해서 내게 들어오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씀으로만 믿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믿고 있느냐? 믿을때 부터 은사로 믿습니다. 다릅니다. 또 믿을때 부터 예수님을 그냥 교리로 믿습니다. 교리는 성경이 아닙니다. 교리는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서 발췌된것이 교리 입니다.
칼빈의 개인 신앙이 발췌된 것이 교리 입니다. 그 발췌된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있는 그대로 성경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소설책을 읽는데 그 소설책을 누가 다른 것으로 번역해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먼저 읽던 소설책을 읽는 것입니까? 아닌 것입니다. 원래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이 원어가 있습니다. 원본인데 원본은 없고 다 사본만 가지고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사본을 그대로 보아야만 우리가 책을 읽은것이지 사본이 영어로 갔다가 다시 중국어로 갔다가 한글로 된 것을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원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느냐 그것은 원래 있는 내용이 있어요 그 내용을 누가 가장 정확하게 흡수하느냐 입니다. 이것만이 '로고스' 예요. 번역물은 로고스가 아닙니다. 좀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번역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잘 모릅니다. 현재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원본을 잘 못읽습니다. 옛날 말이기 때문에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맛소라 학자들이 이것을 이해하기 좋게 모음을 붙여놓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인이 아니기 때문에 신약을 볼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그 원래된 성경을 현재 내가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가장 유사하게 만드는 작업 그것이 제가 하는 번역입니다.
원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예수 믿는 것이지 말이라는 것은 조금만 바꾸어도 의미가 확 바뀌어 버립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표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번역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많이 빼내고 바꿉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왜곡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번역은 번역을 있는 그대로 하는 번역 직역1:1 그 단어는 그것밖에는 안되는것, 다른 단어를 쓰지 않고 오직 그단어로만 합니다. 왜냐 그렇게 원래부터 써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해가 되고 안되고 관계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것이 바로 내가 '로고스'를 접하는 방법입니다.
자! 이 '로고스'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기서 들어가면 다 나오게 됩니다. 소원성취 계시 은사 체험 역사가 이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 들어가면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만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들어가면 이미 말씀은 무궁무진한 수많은 내용들로 꽉차 있거든요
그래서 '로고스'에 바탕이 되어서 믿는 신앙 그것이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험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예요. 하지만 여기서 진짜 계시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부터 있는 일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계시도 옵니다. 또 기적도 옵니다. 표적도 옵니다. 그것들은 '로고스'에서 오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되는데 '로고스'에서 오지 않는 표적들 그것은 가짜입니다.
'로고스'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가짜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왔느냐! 땅에서 왔느냐! 말씀에서 온것이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로고스' 66권이 우리에게 올때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성결이 이루어지고 회개가 나옵니다.
그래서 로고스가 올때 인간은 회개를 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요 그것은 엄한데에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말씀을 기복으로 이해하든지 틀리면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느냐 입니다. 설교는 무엇이냐? 설교는 예화도 아니며 설교는 자기 논문도 아닙니다. 설교는 '로고스'를 오늘날에 맞추어서 정확하게 감동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것이 설교 입니다.
결국은 '로고스'에서 바른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바른 영적인 목적인 영생이 오는 것입니다. 이 요한은 예수님을 잘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실물도 실제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다가 나중에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직접 또 만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데 이 요한이 알고 보니까 내가 만난 예수님이 예수님의 본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나랑 얘기하고 있는데 몸이 그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죽으면 몸이 있지만 그 사람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몸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2000년 전에 예수님! 합니다. 몸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예수님인가요?
그것에 대해 요한이 깨달은 것은 "아! 예수님은 내가 본 분이 아니구나! 아! 예수님은 '로고스' 이시구나! 예수님은 말씀이시구나! 이 모든 성경이 바로 예수님이었구나!" 놀라운 발견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각도로 하나님을 믿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모습은 만나는 존재인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런데 저도 발견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은 성경 66권이시구나!"
그래서 제가 그것 때문에 히브리어로 구약 번역을 하기 위해서 아랍어를 공부한 것입니다.그럴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4복음서를 꿈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헬라어 번역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왜요! 그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거나 느껴야 오시는 분이 아니구나! 하나님은 바로'로고스' 말씀이시구나!" 그래서 말씀 번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 '로고스'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매일 받아들이고 또 깨닫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로고스'로 들어올때 단순한 기도 응답 이런것이 아니고 우리는 성경 원래 목적인 영생이라는 최후 산물을 얻게 되어서 맨 마지막에 우리가 재림 천국에서 그 또하나의 어떤 신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써 영원히 사는 결과물을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맨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다 이수가 될때 맨 마지막에 나도 그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분적 이수 그것은 자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까지 성경을 전부 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성경 전장 강해하는 곳이 전 세계에 없습니다. 하는 사람도 없구요
왜 우리는 성경을 전부 다 빠짐없이 강해 합니까? 이유는 한가지 입니다.이 '로고스'가 단편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단편이 아니고 '로고스'는 다 짝이 있습니다. 로마서를 만들기까지 4복음서가 연결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연결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보아야만 인격적인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전체를 다 강해하는 것입니다.
보통 설교할때 어디 좋은 말씀을 하나 뽑아서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 이것은 로고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이해한 말씀의 자기 정의 입니다. 뭡니까? 설교이지만 그 내용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요 표본 발췌 이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순서대로 이어서 설교합니다. 창세기가 이해 안되면 출애굽기도 이해 못합니다. 출애굽기 이해 안되면 레위기도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맨 처음부터 들어가야만 맨 뒤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원래 그대로가 이해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뒤에서부터 하면 만들어지는 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짜맞춥니다.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로고스는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들일때 성경의 목적이 드디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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